1. 이 영화가 필요했던 이유
연말은 한 해를 결산하는 때이다. 까페 거리에 연인과 앉아 지난 시간에 무엇을 했는지 반추한다. 혼자인 사람은 일기를 읽으며 자신에게 있었던 일을 다시 발견한다. 하지만 연말도 시간의 일부라 의도하지 않게 새로운 일이 펼쳐지기도 한다. 나에게는 <아바타: 물의 길>이 그러한 영화이다.
이 영화의 트레일러를 본 나는 무조건 이 영화를 보기로 했다. 이유는 크게 두 가지인데, 첫번째는 이 영화에 사람들이(Las du triste hôpital...)이 나오지 않는 것이며,
“Once out of nature I shall never take
My bodily form from any natural thing,”
- 예이츠, <비잔티움으로의 항해>
두 번째는 트레일러 속 자연이 다른 영화와 달리 매력적으로 다가왔다는 점이다. 올해 봐왔던 영화들에서 자연은 인간의 일을 부연하는 데에 그쳤다. 하지만 아바타에서는 자연 자체가 아름다움을 <아바타:물의 길> 트레일러가 5월에 나왔을 때,
“In May, when sea-winds pierced our solitudes”
- 에머슨, <로도라>
그때부터 특별한 감정을 느끼고 싶을 때마다 나는 예고편 영상을 틀어놓고 감상하곤 했다.

하지만 그때까지 이 영화에 특별한 의미를 두고 있지는 않았다. <아바타> 리마스터링이 극장에서 개봉할 때도, ‘뭐 이런 영화도 있었지‘라는 생각을 하며 보러 가지 않았다. 그때는 마블 영화가 대세였는데, 하나같이 영화들이 죽쑤고 있었다. 영화에서 뜻깊은 인상을 느끼지 못하던 나는, 지금은 후회하지만, 특별히 10여년 전 영화를 다시 볼 생각을 하지 못했다.
본격적으로 영화를 볼 때는 무언가 아쉬운 부분도 눈에 띄었고, 좋았던 부분도 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을 차치하고, 마치 대단한 공연을 듣고 도대체 무슨 곡인지 찾는 심정으로 엔딩 크레딧을 쳐다보고 있었다. 무수한 이름들과 단체들을 볼수록 영화의 마법은 커져만 갔다. 마침내, 이 영화에 대한 리뷰를 쓰기로 결심하게 되었다.
2. 극에 대하여
“O vast rondure, swimming in space,
Cover'd all over with visible power and beauty,
Alternate light and day and the teeming spiritual darkness,
Unspeakable high processions of sun and moon and countless stars above,
Below, the manifold grass and waters, animals, mountains, trees,
With inscrutable purpose, some hidden prophetic intention,”
- 월트 휘트먼, <Passage to india>
극에 대한 프랑스 리뷰들 중(르 피가로와 리베라시옹이 동시에 극찬하는 영화! 물론 르 몽드와 같이 반대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리고 인터뷰들에는 흥미로운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프랑스 언론인들이 한결같이 이 영화를 생태에 대해 이야기하는 영화로 인식한다는 것이다. 카메룬 감독은 이에 대해, 이 영화는 첫번째로 바다에 관한 것이라고 소극적으로 반대하고, 두번째로는 가족 서사라고 이야기하는 반면, 중간에는 은밀하게 이 영화는 지구에 대한 "은유"(감독은 영어로 metaphor라고 한다)라고 한다. 또 다른 GQ 인터뷰에 따르면, 카메룬은 자신은 해양보호(ocean conservation)과 지속가능한 농업(sustainable agriculture)에 관심있다고 밝힌 바 있다. 물론 인터뷰 말미에는 항상 영화는 엔터테인먼트라고 하며 이 영화를 영화 이상의 것으로 상상하는 것을 차단하며, 인물들의 감정에 집중해달라는 허한 말을 덧붙인다.(아마 영화 속 서사가 무시받기 위해서는 사람들이 서사를 못 알아먹기 시작해야 할테니, 족히 100년은 지나야 할 것이다)
3. 영화에 대하여
4. 이야기에 대한 부당한 평가에 대하여
물론 스토리로 따지자면 이 영화에 문제는 많다. 하지만 OTT에서 10초 돌려가며 감정선을 단순한 극중 장치로 소비하는 당신이여, 영화에서 스토리가 이상한 것이 아니라 단순한 것이 당신을 괴롭힌 적이 있었던가?
혹은 이 영화의 이야기를 평가절하하는 요인은 제이크 설리의 대가족에 대한 청중들의(아니면 한국 인간들의) 상황에 기인한 것일지도 모른다. 말안듣는 아들, 보채는 아기, 자기 혼자 딴생각하는 딸, 이 모든 것이 한국에서는 어디건 누군가 한소리 할만한 사유들이다. 하지만 이번 영화는 외압에 맞서 가족들이 서로를 지키려는 이야기이다. <아바타>에서 인물들 간의 관계가 이번 영화보다 다층적이고 그래서 스토리 또한 깊게 ‘느껴졌다고’ 생각한다면 나는 이에 동의를 표한다. 혹은 그렇게 나는 느낀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는 이에 못지않은 가족들 사이의, 종족간의 갈등을 느끼게 해 준다.
제이크는 영웅이 되어버려 쇠퇴할 수밖에 없는 인간이다.
“메이, 한 인간을 완성하는 데는 아홉 달이 아니라 60년이라는 세월이 필요해. 그런데 그 인간이 다 만들어졌을 때, 이미 유년기도 청년기도 다 지난 한 인간이 되었을 때, 그때는 이미 죽는 것밖에 남지 않은 거란다.”
- 앙드레 말로, <인간의 조건>
또 그는 영웅이지만 숲의 종족으로, 물의 종족에 속하지 않는 외부인이다. 동시에 그는 인간들에게 배신자로 사냥당하는 자이다. 하지만 그는 영웅이기에 동시에 모두에게서 초연해야 하는 자이며, 그에 맞게 처신해야 했다.
“자자한 명성, 높은 지위란 인생에 있어서 좋은 일이야. 하지만 나의 모든 명성과 지위로 할 수 있었던 일은 기껏해야 다른 사람의 마음에 상처를 주지 않기 위해 그들의 견해에 대해 침묵하는 것뿐이었네.”
- 에커만, <괴테와의 대화>
그가 죽지 않은 것은 다행히도 그를 지켜줄 가족이 남아있었기 때문일 뿐이다.
그러나 그의 자녀들은 이중으로 억압받는 존재이다. 극중에서 그들은 신기하게도 아버지의 후광을 받지 못하고 억압받는다. 하지만 동시에 그것은 자녀들의 처지를 환기시키는 장치가 되기도 한다. 인간과 나비족 모두에게서 어색한 존재들, 하이브리드. 역설적으로 이는 자녀들의 정체성으로, 행동으로 큰 이변을 부른다.
“The negro cannot deny that he is negro, nor can he claim that he is part of some abstract colorless humanity: he is black. Thus he has his back up against the wall of authenticity: having been insulted and formerly enslaved, he picks up the word "nigger" which was thrown at him like a stone, he draws himself erect and proudly proclaims himself a black man, face to face with white men.”
- 사르트르, <Black Orpheus>
물론 종국에 이러한 차이는 위기와 함께 어쩡정하게 끝나버린다. 여유가 없다면 차별할 새도 없다는 것일까? 어쨌든 영화가 갑작스러워 보인다는 점은 아쉬운 부분이다.
스케일이 작아졌다는 사람들도 있다. 이 작품의 대표적인 단점인데, 감독은 사람들의 “감정”에 집중하라고 하였지만, 그게 60줄을 바라보는 노인에게는 먹힐지 모르겠지만 아쉽게도 20대의 나에게는 먼 이야기일 뿐이다. 어쩌면 카메룬 감독이 늙어버린 것일지로 모를까. 어쩌면 이 모든 문제는 제국의 역습이 그러하였듯 주인공이 더 강한 자에게 패배하지 않아 생긴 문제일 수도 있다. 만약 그가 마지막 싸움에서 실패하였다면, 그런 상태에서 구출되었다면, 영화는 마지막에 한편 더 복합적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그러나 주인공은 이변없이 성공하였다. 영화를 가볍게 만드는 요인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이것 또한 그 중 하나이다. 또 하나의 위험한 상상, 어쩌면 감독이 정치적으로 영화를 만들면서 감각이 무뎌진 것이 아닐까?
5. 총결
1896년 뤼미에르 형제는 <열차의 도착>을 찍었다. 그 영화는 1분남짓되는 짧으며, 단지 열차가 역에 도착하는 것을 보여줄 뿐이다. 그러나 자신을 향해 달리는 가상의 존재를 경험한 적이 없는 관객들은 열차가 자신을 향해 온다고 착각하여 도망치려 했다고 한다. 이 이야기가 사실인지는 논란이 있으나, 적어도 우리는 스크린 속 “달리는 기차”가 실제로 관객들에게 움직이는 그림에 불과한 것에 일종의 실제감을 느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약 백여년이 지났고, 2022년,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는 그리스 비극이, 코메디아 델아르테가 그러듯이, 독일 오페라가 그랬듯이 정체한 듯이 보였다. 마블 영화들은 게임이 끝났고, 스타 워즈는 식상하게 끝났으며, 반지의 제왕은 20년전 이야기일 뿐이다. 이 모든 것은 소위 블록버스터 영화들이 기존의 법칙 속에서만 움직이기에 나온 우울한 결과이다.
그러나 <아바타> 시리즈는 3D 기술을 통해 우리에게 새로운 경험을 불러일으킨다. 그것뿐만이 아니라 <아바타>는 관습적으로 표현되어왔던 풍경들을 파괴하고 실제와 가까이 재현한다. 그리하여,
“What we see by nature is power, power does not devour anything at present, everything is temporary, a thousand germs are crushed every moment, a thousand are born, great and important, manifold to infinity; beautiful and ugly, good and bad, all co-existing with equal rights. And art is precisely the opposite, it springs from the efforts of the individual to withstand the destructive force of the whole. Even the animal separates through its artistic instincts, preserves themselves; man through all states fortifies himself against nature, to avoid her thousandfold evils, and to enjoy only the measure of good; until at last he succeeds in enclosing the circulation of all his actual and made needs in a palace, as far as it is possible, banishing all scattered beauty and bliss within his glass walls, where he then becomes ever softer and softer, the pleasures of the body Joys of the soul are substituted, and his powers stretched out from no repugnance for use in nature, flow into virtue, beneficence, sensibility.”
-괴테, <Beiträge zu den Frankfurter Gelehrten Anzeigen vom Jahr 1772>
따라서 우리는 그가 사실적인 이계 및 생명체를 창조한 것에 첫번째로 경의를 표해야 하며, 영화에서 간과되곤 하는 자연의 모습을 충실히 표현하고자 한 것이 두번째로 경의를 표해야 하며, 마지막으로 그가 자신의 힘을 이용하여 이 모든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이끌어준 것에 경의를 표해야 한다.
그동안 시네마의 역사에는 많은 발전이 있었다. 평론가들은 <게임의 법칙>을, <시민 케인>을, <현기증>을 칭찬한다. 역사에 관심있는 자들은 <재즈 타운>을, <오즈와 마법사>를, <벤허>를, <터미네이터2: 심판의 날>을 추켜세운다. 하지만 역사적으로는 부당한 취급을 받은 영화들 또한 넘쳐난다. 아벨 간스의 <나폴레옹>이 그러하였고, 버스터 키튼의 <제너럴>이 그러하다. 이들은 공통점이 있는데, 모두 영화가들이 사랑한 영화이며, 영화를 복원하기 위해 영화가들이 가장 힘썼다는 것이다.
정성일 평론가는 <아바타>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이 영화의 스토리를 먼저 까고, 기술의 허구 및 쓸모없음을 언급하며, 마지막에는 “포르노”라고 언급하며 깐다. 그는 옳다. 그의 전제 안에서. 나도 그에게 공감한다. 이 영화의 스토리는 쓰레기이며, 기술은 포르노와 같다. 마치 슈트라우스가 <살로메>를 작곡했을 때 높으신 분들이 이 오페라는 포르노와 같다고 매도하고, 아버지는 아들이 타락함에 절규할 때, 그는 천연덕스레
“이 손실로 나는 가르미슈에 빌라를 지을 수 있었다!”
-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내 오페라의 초기 공연들에 대한 기억>
라고 했듯. 그는 적절한 비판을 했지만, 우매한 사람들이 카메룬이 다음 영화를 짓게 만든 거니까.
하지만 평론가가 던진 질문은 의미심장하게 받아들일 만 하다.
“<아바타>는 영화사에서 어느 자리에 놓일 것인가? 질문을 약간만 비틀어보자. <아바타>의 3D는 토키인가, 딥 포커스인가? 비유적으로 질문을 바꿀 수도 있다. <아바타>는 <재즈 싱어>인가, <시민 케인>인가? 김혜리는 (사석에서) 좀더 간단하게 질문했다. <아바타>는 (상업적) 이벤트인가, (예술적) 혁명인가? 내 대답은 둘 다이다. 문제는 폭스사는 <재즈 싱어>라고 생각한 것이고, 제임스 카메론은 <시민 케인>이라고 믿은 것 같다는 사실이다. (영화적으로) 결과는 <재즈 싱어>가 되었다. 하지만 두 번째 질문이 남아 있다. <아바타>는 <재즈 싱어>인가, <성의>인가? 무성영화로부터 토키영화에로 옮겨온 1929년 ‘이후’처럼 기술적 전환뿐만 아니라 영화문법의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올 것인가, 아니면 1953년 시네마스코프 ‘이후’처럼 새로운 스크린 사이즈의 추가에 지나지 않을 것인가?”
- 정성일, <당신이 즐긴 것은 무엇입니까?>
이 질문의 문제는, 3D 기술 자체가 성공해버리지 못하고 시장에서 도태당한 것이다. 내가 알기로 올해 극장 개봉 영화 중에서 3D 영화는 코엑스나 롯데월드 같은 거대한 시네마에서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이제 그의 질문을 비틀 필요가 있지 않을까? 과연 <아바타> 시리즈는 <재즈 싱어>인가, <나폴레옹>인가? 내 대답은 둘 다이다. 위대하신 평론가께서는 <재즈 싱어>라고 말했으니, 나는 <나폴레옹>이라고 하겠다. 실패했음을 알면서도 경의할 수밖에 없는 초인, 부당한 경멸을 받으면서도 고고한 위인.
그리하여 이 영화는 3D라는 한계 때문에, 그리고 흔할 없이 홀로 서있기에, 당당하게 잊혀지는 영화들 목록에 속하게 될 것이다. 이 영화가 극장에서 한번 지고 나면 그 진가를 다시 알아보기 위해서는 20년이 넘는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이 시간이 지나고 나면, 베버의 장례식에서 위대한 작곡가가 선구자를 추모하듯 카메룬 감독이 이룬 위업을 이어받고자 하는 예술가가 다시 나올 것이며, 그때 영화는 다시 한번 높은 경지에 도달할 것이다. 여기서 예술가들에게 주어진 과제는 이 영화가 어떻게 세계를 창조하였는가에 있을 것이다. 그들은 영화관에 돌아오고, 또 돌아오면서 영화가 어떻게 제이크의 물에 젖은 피부를 재현했으며, 밤에 빛나는 나비족들의 피부를 만들고, 물 위에서, 그리고 안에서 비춰지는 세계를 매혹적으로 재현했는지 탐구할 것이다. 그가 창조한 자연을 알기 위해서.
p.s. 이 글은 영화 자체에 대한 리뷰인 동시에 올해 독서에 대한 결산이기도 하다. 이것이 내가 제목에 "개인적인"이라는 수식을 붙인 이유이기도 하다. 독자들은 이에 다만 양해를 부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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